원주의 독서문화를 선도하는 원주 교육문화관 최수길 관장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성공 스토리

김철우 | 기사입력 2017/05/30 [23:47]

원주의 독서문화를 선도하는 원주 교육문화관 최수길 관장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성공 스토리

김철우 | 입력 : 2017/05/30 [23:47]

 

초등학교 졸업의 정규학력으로 한 도시의 교육문화관장에 오른 인물이 있다. 강원도 교육청 직속기관으로 학생, 학부모와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독서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원주 교육문화관장인 최수길 관장이다. 그의 성장배경과 교육자로서의 인성교육에 대해 들어봤다.

 

▲     © 김철우

 

 

1. 교육문화관 가족과 원주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인사말)

 

 

 

항상 각별한 성원을 보내 주신 원주시민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원주교육문화관은 강원도교육청 직속기관으로 학생, 학부모 그리고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독서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가난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치신 어르신, 외국인 근로자 등이 한글을 익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문해교육에 역점을 두어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교육문화관 서비스가 학생, 학교 지원을 넘어 지역사회 전반에 전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서비스를 발굴하여 제공하고자 한다.

 

 

 

 

 

2. 최수길 관장의 성장배경과 교육자로서의 인성교육에 대하여

 

 

 

.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

 

 

 

홀몸으로 월남하신 아버지 6·25전쟁으로 불구가 되신 어머니

 

 

 

황해도 황주가 고향이신 아버지는 힘든 일 한번 해보시지 않고 곱게 자라서 우리가 시골에 살았음에도

 

농번기에 아무리 바빠도 일손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홀몸 단신으로 월남하셨던 아버지는 남

 

한에 단 한 명의 일가친척이 없었고, 내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는 이미 할아버지여서 힘든 일을 할 수 없

 

었다. 아버지는 일본징용을 끌려갔다 오신 후 생선장수, 엿장수, 닭 장수 등 온갖 어려운 일들을 하셨

 

. 어머니는 6·25전쟁 때 다리를 다쳐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셨다. 평생 장애를 갖고 사셨지만 어떻

 

게든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불구의 몸으로 할 수 있는 빨래, 김매기 등으로 온갖 고생을 하셨다.

 

 

 

가장 싫은 날 소풍과 운동회

 

 

 

아버지는 학교에서 소풍 가거나 운동회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하드(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나타나셨

 

.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셔서 고문을 받아 치아가 모두 빠져 -~”라고 외치시는 발음이 -~”

 

라고 하는 발음으로 들렸고 아이들이 이를 흉내 내면서 나를 놀리는 게 싫었다.

 

초등학교 기성회비를 낼 수 없어서 담임 선생님은 언제까지 낼 수 있느냐고 자주 물으셨고 아버지는 겨

 

울철 교실 난방용 나무장작을 패주는 것으로 기성회를 대신했.

 

 

 

자식들의 고난의 시간

 

 

 

우리 4남매는 초등학교를 억지로 졸업하고 아무도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손위의 누님 두 분은 초

 

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밥이라도 배불리 먹어 보라고 누님들은 식모살이로 어디론가 보내졌고,

 

로하신 부모님과 남동생 이렇게 4식구만이 고향에 남아 명절 때가 되면 동네 어귀에서 누님들을 기다리

 

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키의 반만 한 아이스케키(아이스크림) 통을 메고 그것을 팔기 위

 

하여 땡볕에 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공사 근로자로 일하기도 하였고 신문 배달

 

을 하였다.

 

하루 세끼는커녕 두 끼라도 배고프지 않게 먹을 수 있었으면, 쌀밥은 명절 때 어쩌다 먹을 수 있었고 하

 

얀 고무신은 잘 떨어진다고 까만 고무신만을 신고 다녔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사치

 

스런 바램이었다. 부모님과 4남매가 함께 따듯한 밥과 겨울을 춥지 않게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런 행복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가난에 찌들게 되면 굶주림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미래에 대해 꿈을 갖지 못해 가난이 대

 

물림되는데 다행히 저는 신앙이 갖고 있어서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달라고 매일 저녁 교회에서 기도하

 

였다.

 

그렇게 생활이 가난했음에도 부모님 신앙심은 대단하셨다. 새벽예배로부터 주일, , 구역예배 등 빠

 

지는 일이 없으셨다. 이런 부모님의 신앙관 때문에 동리 사람들은 그 시간에 구걸이라도 해서 배고픈

 

자식들 밥이나 좀 먹이지라며 비아냥거리는 분들도 계셨다.

 

 

 

. 내 인생의 희망 야학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은 꿈도 꿀 수 없었는데 7사단 군인교회에서 군인 아저씨들이 저녁에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 준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선생님들은 낮에는 병사로서 국방에 의무를 다하셨고 저녁에는 가난한 우리 친구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셨다. 가르치는 것만 아니라 인생의 멘토로서 형님처럼 친근하게 대해 주셨다.

 

군인 선생님들은 군대 밥이 본인에게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밥을 식판에 담아와 밥을 나누어 주기도 하

 

셨고 비누, 치약 등을 나누어 주며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모든 선생님이 고마운 분이셨지만 그 중 특별히 나에게 관심을 두신 분이 계셨는데 군대를 제대하고도

 

많은 조언으로 힘을 주신 분이 있는데 LG그룹의 부회장으로 계시는 차석용 선생님이시다.

 

내가 얼마나 촌뜨기 소년이었던지 16살 되던 해 춘천이란 도시로 검정고시를 보기 위하여 처음 버스를

 

타고 왔는데 기차를 처음 보고는 나도 모르게 ! 기차다크게 소리를 쳤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다.

 

고마운 군인 선생님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였고 춘천의 제일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하여 유학의 길에 올랐다. 처음으로 입어보는 교복 그리고 난생처음 신어보는 구두,

 

과서, 기숙사에서 제공하는 따뜻한 세끼의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동화 속

 

왕자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내가 입학식 때 입고 갈 교복을 옆집의

 

숯불 다리미를 빌려와 곱게 다려주시면서 어떻게 우리 가족에게 이런 좋은 날이 올 수 있었냐며 눈물

 

을 흘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멋들어진 교복과 처음 신어 어색한 구두지만 허리를 고추 세우고 당당하게 입학식장에 들어갔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사진기사 한 분이 내게 오더니 학생, 입학식에 혼자 왔느냐? 참 안됐다며

 

기념사진이라도 찍어 참석 못 하신 부모님에게 보내 드리라고 사진을 찍어줬다. 주위 분들이 챙겨주신

 

용돈을 꺼내어 사진기사에게 주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진을 안 보내고 있다. 이글을 어디서

 

신다면 부탁하고 싶다.

 

사진사님 제발 사진 좀 보내 주세요. 그게 교복을 입고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거든요.”

 

기숙사 생활을 하였던 나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갈 수 있었는데 내가 집에 가는 날 이웃집 아주머니는

 

어린 것이 기특하다고 기르시던 닭을 우리 집 빨래 장대에 매어주시면서 어머니에게 아들 먹여 보내라

 

고 하시던 고마운 분, 학비에 보태라고 용돈을 주시는 분도 있었다. 너는 커서 장군이 될 거라며 칭찬도

 

많이 해 주셨다.

 

그러나 그 행복도 얼마 가지 못했다.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학비는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화천에서 춘

 

천으로 유학을 온지라 기숙사비를 내야 하는데 가발공장 근로자로 일하며 기숙사비를 보내 주시던 큰

 

누님이 결핵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어 기숙사비를 내지 못해 결국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기숙사에서 쫓겨난 후 잠잘 곳이 없어 친구 자췻집에 얹혀살았다.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처지였고 부

 

모님의 지원이 충분치 못했다. 어느 날 이 친구는 먹음직스러운 맘모스 빵을 한 봉지 사왔고 우리는 정

 

신없이 맛나게 먹었다. 빵을 먹은 후 그 친구도 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그쳐 물었

 

. “돈이 어디서 나서 이 빵을 사왔느냐.”. 이 녀석은 고개를 숙이더니 같은 반 아이의 참고서를 훔

 

헌책방에 팔고 그 돈으로 빵을 사 왔노라고 했다. 나는 그 친구를 한 대 후려갈기고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다시는 굶어 죽더라도 이런 짓 하지 말자고.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기숙사 밥을 훔쳐 먹다가 적발되어 학생과에 끌려가 기절하도록 얻어맞고 1학년

 

을 채 마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학교를 퇴학당하고 사회를 원망하였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뭘 잘 못 했기에 남들 다 다니는 학교

 

한 번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쫓겨나야 하는지, 신은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시련을 주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한편 고향 집에서는 4살 아래 동생은 부모님과 내 걱정은 말고 형이 공부 잘해서 집안을 일으켜 달라며

 

나를 대신해서 맏아들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14살이었던 어린 동생은 돼지 농장에서 임료를 받고 추운

 

겨울이나 한여름에 손수레로 군부대에서 나오는 짬밥을 배달하고 돼지우리를 청소하여 받은 돈으로 부

 

모님을 봉양하였는데 어린 나이에 일이 어찌나 힘들었는지 다리가 영문도 모르는 채 썩어 들어가 걷

 

도 못하게 되었고,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참을성 많은 동생이었는데 어찌나 아팠던지

 

매일 울었다. 병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고양이 뼈를 달여서 먹으면 낫는다고 하기에 들고양이를 동

 

생에게 먹이기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어머니는 동생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동네 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다니셨다. 어머니는 동생의 곪

 

은 다리를 붙잡고 눈물로 기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 어머니는 6·25 때 피폭으로 한쪽 다

 

리를 이미 못 쓰셨는데 이렇게 기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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