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읽는 책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어내는 조각-푸른숲 시골빛 삶노래(12)

최종규 우리말지킴이 | 기사입력 2014/07/24 [00:17]

한 사람이 읽는 책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어내는 조각-푸른숲 시골빛 삶노래(12)

최종규 우리말지킴이 | 입력 : 2014/07/24 [00:17]

날마다 신문이 나옵니다. 신문은 날마다 온갖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얻습니다.
 
날마다 아침이 밝습니다. 동이 트는 하늘은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침저녁으로 노래하는 새와 풀벌레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어 줍니다. 하늘과 해와 구름을 보면서, 또 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얻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신문에도 있지만, 나무 한 그루한테도 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텔레비전을 켜서 보는 방송에도 있지만, 풀 한 포기한테도 있습니다.
 
해마다 오월이면 붓꽃을 누립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도 붓꽃을 보고, 마을 어귀에서도 붓꽃을 봅니다. 노랗게 봉오리를 올리기 앞서 푸른 잎사귀만으로 붓꽃인 줄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지만,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붓꽃을 늘 쳐다보니, 다른 데에서도 여린 줄기와 꽃대와 씨방을 볼 적에도 붓꽃인 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장미는 붓꽃이 피고 질 무렵 천천히 봉오리를 벌립니다. 소담스러운 봉오리를 볼 때마다 언제나 놀랍니다. 이 가느다란 줄기에서 어쩜 이렇게 커다란 꽃송이를 내놓을 수 있니.
 
장미꽃이나 동백꽃은 꽤 오랫동안 꽃내음을 베풉니다. 그리고, 어느새 톡 떨어집니다. 꽃이 지고 난 장미나무나 동백나무는 썰렁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꽃을 피우려고 자라지 않아요. 줄기를 힘차게 올리고, 잎사귀를 푸르게 벌리면서, 한결같이 푸르면서 싱그러운 바람을 내뿜으면서 자랍니다. 꽃은 꽃대로 볼 만한 나무이면서, 꽃이 없을 적에는 잎사귀와 가지와 줄기를 기쁘게 노래하는 나무라고 느낍니다.
 
아마 백만 사람은 나무한테서 꽃을 읽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주 많이 읽히는 책이란, 꽃과 같은 숨결이리라 느낍니다. 꽃이 아닌 잎사귀나 줄기나 가지나 뿌리를 읽는 사람도 있어, 어떤 책은 백 사람이 읽거나 천 사람이 읽곤 합니다. 때로는 열 사람이나 한 사람이 읽는 책이 있어요.
 
널리 사랑받는 책이라면 널리 꽃내음을 나누어 준다고 할 만합니다. 깊이 사랑받는 책이라면 깊이 푸른 바람을 나누어 주지 싶습니다.
 
사진가 이상엽 님이 선보인 《최후의 언어, 나는 왜 찍는가》(북멘토,2014)라는 책을 읽다가 “구럼비 해군기지 공사장을 따라 이렇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을 세운 이스라엘을 욕하다가 우리 땅에서 이런 풍경을 본다(64쪽).”와 같은 대목을 곰곰이 새깁니다. 그렇지요.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있습니다. 아니, 한국에서는 꽤 예전부터 ‘분리 장벽’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전국체전을 할 적마다 중앙정부와 지역정부에서 ‘골목집 많은 동네’ 앞에 높다랗게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보기 안 좋다’고들 했습니다. 1986년과 1988년을 앞두고는 참으로 많은 골목동네가 깡패와 전투경찰과 공권력 주먹질에다가 군화발에 사라졌습니다. 제주섬에 만든다는 해군기지 때문에 또 ‘높다란 울타리’가 생긴다는데, 나는 내 고향 인천에서도 ‘높다란 울타리’를 여러 해 보았어요. 지난 2006년이었는데, 작은 사람들이 모여 이룬 작은 골목동네 한복판에 인천시청에서 너비 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내려고 몰래 토지수용을 했고 몰래 철거까지 마쳤어요. 뒤늦게 산업도로 계획을 알아낸 ‘남은 동네사람’이 이를 반대하려고 했지만 힘이 닿지 않았는데, 산업도로 계획을 반대하는 동네사람이 늘고 또 늘어나니, 인천시청에서 한 일은 높다란 울타리 세우기였습니다.
 
사진가 이상엽 님은 “한국 사진가의 위안부 할머니 사진이 정작 한국 사진계에서 외면당하는 현실. 차라리 이것이 자본의 문제라면 사진가들은 사회적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는 자신의 의무도 책임도 명예도 내려놓아야 할 지경이다(142∼143쪽).” 하고 덧붙입니다. 한국사람이 찍은 한국 이야기를 정작 한국 사진가들이 등을 돌린다고 해요. 그래요, 그렇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성노예로 고단한 삶을 보내야 했’던 할머니들 이야기는 1980년대가 저물고 1990년대가 찾아올 무렵부터 비로소 불거졌어요. 이때에 이 할머님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고 말씀을 들으며 한국과 지구별에 이 이야기를 알리려고 한 사진가는 매우 드뭅니다. 사진가뿐 아니라 지식인도 퍽 드물었고, 사진가와 지식인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 또한 이러한 이야기에 그닥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들도 이녁 삶이 바쁘다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귀여겨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사진가만 탓할 일은 없다고 느껴요. 사진가를 탓하기 앞서 이 나라 얼거리가 뒤틀렸어요. 뒤틀린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고 학문을 하며 이것저것 배운 사람들이 뒤틀린 몸짓으로 뒤틀린 일을 하는 모습은, 어쩌면 매우 마땅한 흐름일 수 있어요. 어릴 적부터 아름다움을 못 보고 자랐으니까요. 어린 날부터 사랑스러움을 못 느끼며 컸으니까요.
 
입시지옥인 한국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몸가짐이 배는 아이들입니다. 입시지옥이 끝나고 대학교에 다니더라도 취업지옥이 기다리기에, 다시금 동무를 동무로 삼지 않는 매무새로 젖어드는 아이들입니다. 언제나 점수따기에 숫자싸움만 하던 아이들이 ‘몸뚱이만 어른이 되’어요. 피가 튀기는 싸움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기자가 되거나 사진가가 되는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상엽 님은 “사진기자들은 경쟁하듯 문제 있는 사진을 찍어 전송하고 이는 무분별하게 지면화되고 있다. 이들 대다수 기자의 심리에는 공리주의가 도사리고 있다(242쪽).” 하고 덧붙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헤아려 봅니다. ‘공리’란 무엇이고 ‘공리주의’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공리주의’를 “(1) 모든 일에 개인의 공명(功名)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나 태도 (2)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에 두는 사상”으로 풀이합니다. 사진기자뿐 아니라, 대통령과 시장과 군수와 교장과 교감을 비롯해, 여느 어른과 아이 모두, ‘내 밥그릇’이 아닌 ‘우리 마을’을 헤아리도록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읽을 책은 어떤 책일 때에 아름다울까요. 우리가 쓸 책은 어떤 책일 때에 사랑스러울까요. 백만 사람을 섬기는 일이 한 사람을 망가뜨리려 한다면? 한 사람을 섬기려 하면서 백만 사람을 짓밟는다면?
 
나무와 같은 책이 되고, 열매와 씨앗과 같은 책이 되며, 꽃과 잎사귀와 같은 책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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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최종규 :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를 전남 고흥에서 꾸린다.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살려쓰기》, 《사진책과 함께 살기》 같은 책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 후원 은행계좌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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