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짓는 노래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어내는 조각-푸른숲 시골빛 삶노래(14)

최종규 우리말지킴이 | 기사입력 2014/08/15 [10:14]

내가 짓는 노래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어내는 조각-푸른숲 시골빛 삶노래(14)

최종규 우리말지킴이 | 입력 : 2014/08/15 [10:14]

‘흙’을 없애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이 땅에 뒤덮으면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떨까요? 잘 생각해 보셔요. 흙길이 아닌 시멘트길이나 아스팔트길이라면 자동차가 달리기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시멘트길이나 아스팔트길에서는 아무 싹이 못 돋습니다. 시멘트길에서는 나무가 자랄 수 없고, 아스팔트길에서는 꽃이 필 수 없습니다. 오직 흙으로 된 곳에서만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핍니다.
 
논에 시멘트를 덮으면 어떻게 될까요? 논이 죽습니다. 밭에 아스팔트를 덮으면 어떻게 될까요? 밭이 죽어요. 요즈음은 논도랑에 시멘트를 부어서 물이 잘 빠지도록 하기 일쑤입니다. 논에 시멘트를 덮으면 논이 죽는데, 논도랑이 흙도랑 아닌 시멘트도랑으로 바뀌면 어떻게 될까요? 볍씨를 심은 데만 흙이고 논도랑과 논둑은 시멘트라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 사회는 1970년대부터 불어닥친 새마을운동과 함께 도시와 시골 모두 흙을 없애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들이붓습니다. 한국 사회는 ‘어디이든 자동차가 다니기 좋은 길’을 뚫습니다. 한국 사회는 ‘어디이든 나무와 풀과 꽃이 자라기 좋은 흙’을 살리거나 북돋우거나 가꾸지 않습니다. 잘 헤아려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에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널리 퍼질 무렵부터 아이들이 골목이나 고샅에서 뛰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도시(골목)에서나 시골(고샅)에서나 그야말로 재미나고 즐겁게 뛰놀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놀이터(골목·고샅)를 빼앗겼어요. 어른들이 만들어 어른들이 타는 자동차한테 빼앗겼어요.
 
아이들한테서 놀이터(골목·고샅)를 빼앗은 어른은 대통령이나 군인이나 경찰 따위가 아닙니다. 바로 ‘아이를 낳은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한테서 놀이터를 빼앗았습니다. 아이들이 더 멀리 더 느긋하게 다니도록 자동차를 몬다고 하지만, 하루 가운데 자동차를 타고 움직일 때보다 놀아야 할 때가 훨씬 깁니다. 학교이든 일터이든 굳이 자동차를 안 타도 됩니다. 걸어서 다니면 됩니다. 한두 시간쯤 얼마든지 걸을 만합니다. 예전에는 한두 시간뿐 아니라 서너 시간도 넉넉히 걸었습니다. 집과 학교(일터)가 십 킬로미터쯤 떨어졌어도 걸어서 오갔어요. 자가용이든 버스이든 전철을 탈 일이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스스로 두 다리를 바라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동안, 아이들은 골목과 고샅 빈터를 자동차한테 빼앗기고 경운기한테 빼앗깁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놀지 못합니다. 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학원에서 대입시험지옥에 빠져듭니다.
 
권정생 님이 쓴 동화책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우리교육,2000)를 읽으면, “큰 소리로 떠들자, 소리는 유치원 창문으로 날아갔어요. 유치원 나무들이 그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먼 데 산으로 강으로 날아가 산벚나무랑, 조밥꽃나무랑, 찔광이나무랑, 참나무랑, 보리둑나무랑 모두 들었어요. 시냇물 고기들도, 그리고 아마 하늘의 별님들도, 달님도 들었을 거예요(26쪽).”와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또야 너구리’는 기운 바지를 입고 싶지 않았다는데, 또야 너구리 어머니는 또야한테 ‘기운 바지를 입으면 나무가 한결 잘 자라고 물고기도 더 즐겁게 놀며 하늘에 있는 별도 더욱 반짝반짝 빛난다’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또야 너구리는 너구리 유치원에 가서 유치원 선생님과 동무들한테 이 이야기를 해요. 모두들 이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서 노래를 부릅니다. 큰 소리로 떠들듯이 하하하 웃고 노래합니다.
 
나이 마흔 줄을 넘긴 어른이라면 아마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어디에서나 노래가 흘렀습니다. 아이들은 골목과 고샅에서 놀면서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가 아니라, 아이들끼리 놀면서 스스로 즐기는 ‘놀이노래’를 불렀어요. 아이들이 놀이노래를 부르던 때에는 어른들은 일하면서 스스로 즐겁게 ‘일노래’를 불렀어요.
 
민속학자는 ‘놀이노래’를 ‘전래동요’라는 한자말 이름으로 가리키고, ‘일노래’를 ‘노동요’라는 한자말 이름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늘 노래일 뿐입니다. 삶이 즐거우니 저절로 샘솟는 노래일 뿐입니다.
 
소꿉놀이를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밥을 지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풀을 뜯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동생을 보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놀던 지난날에는 누구나 노래를 부르던 삶입니다. 좀 가난하다거나 좀 꾀죄죄하게 보였을는지 몰라도, 누구나 서로서로 아끼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던 아름다운 삶입니다.
 
오늘날 삶을 그려 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멀끔한 옷차림에 번듯한 자가용을 몰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눈부신 아파트에 번쩍거리는 불빛이 가득한 도시에서 문화와 여가를 누리지요. 그러면, 이런 문명사회에 어떤 노래가 흐르는가요. 오늘날 사람들은 ‘작곡가’나 ‘가수’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노래를 짓지 않습니다. 작곡가나 가수는 돈을 벌려고 노래를 지을 뿐, 삶을 가꾸려고 노래를 짓지 않습니다.
 
흙이 사라지면서 삶이 사라집니다. 흙과 삶이 사라지니 아이들은 놀이터를 빼앗기며, 어른들은 쳇바퀴를 도는 쥐처럼 ‘일상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힙니다. 어떻게 살 때에 즐거울까요? 어떻게 삶을 가꿀 때에 아름다울까요? 스스로 바꾸려 하지 않으면 하나도 안 바뀝니다. 도시와 시골에서 흙을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하나도 안 바뀝니다. 고속도로를 새로 늘리지 말아야 합니다. ‘있는 고속도로’도 뜯어서 없애고, ‘있는 찻길’도 뜯어서 치울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뛰놀 빈터를 마련하고, 나무가 우거질 숲을 돌볼 노릇입니다.
 
권정생 님은 동화를 빌어 “밤뻐꾸기가 우는 밤이면 할머니 혼자 마당에 거적을 깔아 놓고 하늘을 쳐다봅니다. 별이 총총 나와 있습니다. 타작 마당에 콩알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별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의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는 걸까요(58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마당에 거적을 깔고 별바라기를 하는 할매는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시골 할매는 시골에서 텔레비전을 볼 뿐입니다. 도시 할매는 불빛이 너무 밝아 밤별을 볼 수조차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별바라기가 사라지는 한국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별바라기이든 해바라기이든 사랑바라기이든 꿈바라기이든 노래바라기이든 놀이바라기이든, 모두 잊거나 잃은 채 따분한 하루를 맞이합니다. 우리는 어떤 노래를 지어서 우리 스스로 불러야 할까 궁금합니다.

 
글쓴이 최종규 :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를 전남 고흥에서 꾸린다.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살려쓰기》, 《사진책과 함께 살기》 같은 책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 후원 은행계좌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최종규 우리말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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